* 2012. 5. 20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절이지만 그 만큼 많은 탑과 불상이 있어서 그런 이유로 천불천탑으로 불리고 있는지 탑과 불상을 일일이 세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조선 성종 12년(1481년)에 처음 편찬되고 중종 25년(1530년)에 증보된 <동국여지승람>의 능성현(綾城縣)조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다.
절 좌우 산마루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개 있고, 또 석실이 있는데 두 석불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있다.(雲住寺在天佛山 寺之左右山背石佛石塔各一千 又有石室二石佛相背以坐)"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그 당시에는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기씩이나 실제로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이곳의 탑과 불상을 헐어다가 묘지 상석이나 주춧돌, 섬돌 등으로 쓰거나
축대를 쌓는 데 썼고, 때로는 통째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도 했다고 한다.
1942년까지만 해도 석탑은 30기, 석불은 213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석탑 12기, 석불 70여 기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면 누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이처럼 많은 석탑과 석불을 세웠을까?
이곳에 석불과 석탑을 세운 사람은 도선국사(827~898)라 하기도 하고,
그 외에도 신라 때의 고승인 운주화상이나 중국 설화에 나오는 선녀인 마고할미라고 하기도 한다.
조성 목적 또한 다양하게 전하고 있는데,
서울을 옮기기 위해서, 국태민안을 위해서,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등으로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운주사는 고려시대인 11세기 초에 창건된 후 12세기에 전성기를 거쳐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후 논밭으로 변한 운주사터에 1918년에 인근 사람들의 시주로 허름한 건물이 중건되었고,
근래에 들어 번듯한 대웅전이 지어졌다.
일주문을 들어서서 대웅전으로 가지 않고 왼쪽의 산 능선으로 바로 올라간다.
절을 둘러보기 전에 전체적인 모습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중턱 곳곳에 세워진 탑과 각각의 모양인 불상을 보면서 이 시대 석공의 색다른 마음을 옅볼수있다.
운주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세개있다.
운주사 구층석탑, 운주사 석조불감, 운주사 원형 다층석탑 이다.
그렇지만 운주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것들이 아니라 운주사 와불이다.
이 와불은 국보도 아니고 보물도 아닌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화재적인 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다는 이야기이지만 그럼에도 이 와불이 이처럼 강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운주사의 다른 석불들은 모두 일어서 있는데, 이 와불만은 누워 있다.
천불천탑 가운데 마지막 천 번째 불상이라는 와불은 한쪽은 몸집이 크고 다른 쪽은 조금 작은 데,
큰 와불은 그 길이가 12m가 넘는 거대한 석불이다.
사람들은 이 와불이 벌떡 일어나 새로운 세상, 살기 좋은 세상이 오기를 바라지만.
하지만 모두가 그토록 바라는 새로운 세상은 그렇게 쉽게 오지는 않을 모양이다.
지금도 와불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말없이 누워만 있다.
그것은 와불이 사람들의 그런 바람을 몰라서가 아니라 어쩌면 아직은 그때가 되지 않아서일까.
운주사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많은 석탑은 그 생김새가 다 제각각이다.
석탑을 만든 석공이 온갖 상상력을 다 동원해 만든 것처럼 운주사 원형 다층석탑도 그런 석탑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탑신부는 모두 6층이지만, 원래는 더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육층석탑이라 하지 않고 다층석탑이라 한다.
운주사 여러에 흩어져 있는 석탑과 석불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는 석조 불감이다.
불감(佛龕)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뜻한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이 석조 불감은 골짜기 중심부에 있다.
그 모양은 팔작지붕을 한 목조 건축물의 형식을 하고 있으며,
그 앞뒤로 석탑 1기씩이 서 있어 야외 불당(佛堂)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오층석탑 하나에서도 파격적인 형태의 탑이 있다 .
이 탑의 지붕돌은 그야말로 제멋대로입니다.
얼마나 누추해 보였으면 사람들은 이 탑을 거지탑이라고 할까.
그 모습이 마치 누더기 옷을 걸친 거지와 다를 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일까.
이 탑의 지붕돌은 넓적한 돌덩이를 다듬지 않은 채 그냥 그대로 올려놓은 모양새이다.
모나면 모난 대로, 깨진 것은 깨진 대로 그냥 탑에 올려놓았다.
그저 넓적할 뿐 여기에 어떤 손질도 하지 않았다.
왜 이처럼 무심하게 탑을 만들었을까?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 순수의 미를 추구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아무런 생각이 없는 상태, 무심의 경지에서 만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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